세림세무법인

	
	
    
	    
    
    
    
	









세금이야기

home Topic별 세무세금이야기
제목
[칼럼]북경 여행기
 인쇄
작성자
김창진
조회수
1,561
날짜
2014-09-12
첨부파일


오랫동안 같이해오던 친목 모임에서 해외여행을 기획하여 중국 북경 주변을 둘러보는 여행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북경을 여행하면서 느낀 소회를 기록하며 함께 그 느낌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북경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면,
북경, 베이징은 중국 허베이성 [Hebei, 河北省(하북성)] 중앙부에 위치한 중국 수도로서 면적은 16,808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천5백2십만명(2006년기준) 정도 되고, 행정구역은 16구 2현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도시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국시대(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수도였는데, 당시는 지 [冀, Jì] 라고도 불렸습니다.
그 후에 요. 금. 원. 명. 청나라를 거쳐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 까지 8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서울이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 까지 6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에 비하여 약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 같습니다.
소개한 바와 같이 북경은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이므로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과 볼거리들을 가지고 있어 수많은 인구가 사는 커다란 현대 도시 이면서 그 자체로 문화 유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만리장성과 이화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둘 다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문화적가치가 대단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 저자의 생각에 그 상징적으로 나라와 국민에 끼친 영향이 상반된다 생각되기에 그 의미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1.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처음 축성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 진나라 시대부터라고 합니다. 
 
 북방 유목민족이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자,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를 지어 물자가 풍부한 남쪽으로 침략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때 마침 진나라가 통일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어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대비하고자 장성 축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은 진나라 시대부터 시작했으니 그 역사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규모는 5천만 킬로미터가 된다고 합니다.
또한 축조의 시작은 진나라에서 시작했지만 명나라 시대에 대부분 축조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은 군사적 침략에 대비하여 만든 방어막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습니다.
 
 장성 축조에 동원된 국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며, 끝도 없이 펼쳐진 장성 위를 걷으며 생각해봤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며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장성을 축조하여 온 것이, 비록 당시는 고통스러웠고 과정에 말 못할 어려움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대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중국이라는 큰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2.이화원




 이화원은 청나라 말기의 여자 황제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라고 합니다.

이화원의 전신은 북경 청의원이었는데, 청말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태워져, 후에 광서 14년 (1888년)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습니다.
그 후로도 1900년 전쟁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그 때마다 서태후는 어려운 나라 사정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자금을 들여 복구하였다 합니다.
 이화원의 조를 둘러보면 총면적 290만평방미터로 엄청난 면적,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와 호수에서 파낸 흙을 쌓은 만수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 중 호수의 면적이 3/4를 차지합니다.
 문화적 가치로는 이화원 전체로 완전한 형태로 잘 보존된 황족 정원으로 가치가 있으며 내부에 수많은 가치 있는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황제 개인의 향락을 위하여 거대한 호수를 파고 인공산을 만들고 호화로운 궁전을 만든 그 시대를 생각하면, 국민이 불쌍하고 그런 나라가 온전히 굴러갈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될 겁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외국과 전쟁의 와중에 있던 시기였는데 해군의 예산으로 별궁을 축조하다니 !

 당시의 서민들 입장에서 본다면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데 동원되건, 이화원 만드는데 동원되건 고달프긴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건축물로 인해 미치는 상징적 영향은 너무나도 다른 차이가 납니다.


 그 후 청은 망했고 중국은 향후 100여 년간 유사 이래로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지내야 했습니다.

 기업운영도 위에서 설명드린 만리장성과 이화원처럼 그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김창진 (taxmgt@taxemail.co.kr)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9-09 09:36:07 회원의방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9-25 11:34:42 세림칼럼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9-25 11:40:10 고객의 소리에서 이동 됨]
게시글 SNS 공유
이전글 [칼럼]위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칭찬 10계명
다음글 [칼럼]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TOP